퇴사 후 어느 날, 문득 내 삶이 너무 느슨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언가 이뤄낸 것도 없고, 하루하루가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나를 마주하며, 처음으로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마음 깊이 떠올랐습니다.
이 글은 그날의 나를 붙잡아준 감정의 기록이자, 스스로를 다시 설득한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는 하루 끝, 나를 의심한 날
그날도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일어나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잠깐 산책을 다녀오고, 커피를 마시며 책 몇 장을 넘겼습니다.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 리스트가 있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고, “내일 하지 뭐”라는 말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하루를 보내버렸습니다.
밤이 되어 조용해진 방 안에서 불 꺼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사람일까?”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구체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닌데,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하루가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전처럼 회의도 없고, 보고서도 없고, ‘성과’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성과가 곧 내 존재의 증거처럼 느껴졌습니다.
야근을 하든, 무리해서 일하든, 어쨌든 “나는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판단이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흐릿해졌습니다.
이 삶이 정말 ‘괜찮은’ 삶인지, 나는 여전히 사회 안에서 의미 있는 존재인지,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질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것이었고, 감정의 표면이 아니라 정체성 그 자체를 흔드는 질문이었습니다.
기준이 사라졌을 때, 자존감은 어디에 기대야 할까?
내가 흔들렸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지금의 나는, 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사라는 시스템은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늘 제공해 주었습니다. 성과, 연차, 직급, 연봉, 칭찬, 질책, 출석. 그 기준 안에서 나는 어디쯤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안정감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퇴사 후의 나는 그러한 기준이 사라진 공간에 서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평가해줄 상사도 없고, 같이 비교될 동료도 없고, 피드백을 줄 팀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꾸 불안해졌습니다.
‘잘하고 있다’는 확신을 외부로부터 얻지 못하니, 그 자리를 비교와 자책이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SNS에서는 누군가가 책을 출간하고, 누군가는 강연을 다니며, 또 누군가는 여행 중에도 새로운 커리어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반면 나는 여전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고,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아 자꾸만 숨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도 나름의 루틴을 지키고 있었고,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고, 전보다 내 감정에 훨씬 민감해진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노력을 성과로 환산하지 못한 나의 시선이었습니다.
결국 자존감이 흔들린 이유는,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너무 박한 시선을 들이댔기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연습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의 나는 어떤 기분이었지?”, “무언가 하지 않았더라도, 느낀 게 있다면 괜찮아.”
성과나 결과물이 없어도 괜찮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는 연습. 그 연습이 조금씩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예전에는 ‘계획을 지켰는가’가 하루의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나를 잘 돌보았는가’가 그 기준이 되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글 한 줄을 썼고, 따뜻한 차를 마셨고,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안부를 건넸다면, 그 하루는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바뀐 것은,‘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성과로 판단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뭔가를 해냈을 때만 나 자신을 칭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도 “오늘 하루, 나로서 잘 살아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완성된 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합니다.
나는 지금,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삶의 방향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는 것.
그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요.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때때로 날카롭지만, 그 질문에 진심으로 마주하면 결국 나를 더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의 끝에는 다정한 수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조용히 내 하루를 살아낸 나에게 말해봅니다.
"그래,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나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