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오롯이 쉰다고 생각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휴식은 어느새 계획이 되고, 정리가 되고, 일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쉼의 경계가 흐릿해진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다시 일하고 있던 나’를 자각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퇴사 후, 일하지 않고 보낸 마지막 날은 언제였을까?
퇴사 후, 일하지 않고 보낸 마지막 날은 언제였을까?

 

처음엔 분명 쉬기로 했다, 정말이지

 

퇴사한 직후, 나는 분명 스스로에게 선언했습니다.
“한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그냥 쉬자.”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고, 당시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매일 아침 알람 없이 일어나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나가며 ‘나의 속도’로 하루를 보내는 일상이 너무 좋았습니다. 밤에는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평온하게 시간을 흘려보냈고, 특별한 일정도 없이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없이 호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라는 구조 없이도 나는 잘 지내고 있었고, 더는 생산성과 결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는 나날들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쉼조차도 어쩌면 ‘잘 쉬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습니다. 책을 읽고, 영감을 얻고, 일기를 쓰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루틴을 스스로 짰고,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쉼을 넘어서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쉼은 언제부터 일이 되었을까?

 

어느 날 문득, 일요일 저녁에 습관적으로 노트북을 켰습니다. 다음 주에 하고 싶은 일들을 메모하고, 콘텐츠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블로그에 올릴 포스트의 윤곽을 잡고 있던 그 순간, 이상한 감정이 찾아왔습니다.
“어라, 지금 나 일하고 있네?”

처음엔 그저 취미처럼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관심 있는 분야의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이걸로 수익을 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조금씩 몰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분명 쉬기로 했는데, 나는 어느 순간 다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회사 일’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설정한 일정과 기준, 콘텐츠 관리표, SNS 캘린더 같은 것들에 나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일’은 단지 소속이나 급여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그건 이미 일이 된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 사실은, 다소 씁쓸한 동시에 묘하게 안심이 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쉼과 일 사이에서 나를 조율하는 법

 

그 이후 나는 ‘일하지 않고 쉰 마지막 날’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달력에는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 분명히 있었지만, 마음은 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냥 쉬자’고 말하면서도, 블로그 트래픽을 확인하고, 글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영상 편집 앱을 열어보는 나를 보고 있으면 ‘나는 정말 쉬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쉼’을 의식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어떠한 결과물도 생각하지 않기
  • ‘이걸 나중에 써먹어야지’라는 생각 없이 콘텐츠 보기
  • 산책이나 독서를 아무 목적 없이 해보기

그렇게 ‘일이 아닌 시간’을 의도적으로 만들다 보면, 마음이 조금씩 비워지고 나를 덜 재촉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런 시간 속에서 오히려 가장 좋은 아이디어나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쉼’과 ‘일’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프리랜서이거나, 창작 활동을 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무직 상태로 스스로를 기획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건 바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스스로 허락할 수 있는가인 것 같습니다.

퇴사 후, 나는 쉰다고 말했지만 쉼은 늘 뭔가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 나를 점검하지 않으면 어느새 또다시 일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나는 여전히 바쁜 사람이고, 멈추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쁨 속에서도 나를 조절하고, 멈추는 순간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로 남기고 싶습니다.